[슈찬] 내 커피머신 속에 요정이 산다 (celebrate 밤비님's Birthday)


[슈찬] 내 커피머신 속에 요정이 산다 (celebrate 밤비님's Birthday)

1. “총각, 이거 하나만 사가슈“
퇴근길,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민석을 다짜고짜 붙잡은 할머니는 보따리에서 커피머신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딱봐도 낡고 작동은 되는지 의심될정도로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할머니의 행색이 초라해보여 지갑을 꺼낸 민석은 값을 지불하고 작은 커피머신을 받아들었다.
“좋은일이 생길거여. 좋은일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낡은 커피머신을 사줘서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돌아선 민석은 집에 도착한 뒤 식탁위에 던지듯 머신을 방치해두었다.
그 후, 매일 열잔도 넘게 커피를 마시면서도 단한번도 낡은 커피머신을 건드리지 않던 민석은 급기야 머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기까지했다. 그렇게 주말의 아침이 밝았다. 눈뜨자마자 커피머신을 찾던 민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식탁 한구석에 처박혀있던 낡은 커피머신이, 자신의 보물1호 최신식 고급커피머신의 자리에 떡하니 놓여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밤새 도둑이 다녀갔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제 최신식 고급커피머신은 어제까지만해도 낡은 커피머신의 자리였던곳에 있었으니까.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지진나듯 동공을 굴리던 민석이 침을 꼴깍 삼키고 낡은 커피머신을 톡하고 건드려보았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커피머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민석은 수건을 가져와 조심스레 낡은 커피머신의 먼지를 닦아내었다. 먼지를 걷어내니 좀 그럴듯해 보이는 외양에 옛날엔 꽤나 값좀 했겠다 생각한 민석은 원두가루를 넣고 머신을 작동시켰다. 길어야 10분정도 걸릴거라 생각한 민석은 머신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하지만 커피머신은 30분이 지나도 묵묵부답이었다.
'고장났나?'
민석은 역시 고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머신을 한대 꽝 내리쳤다. 그리고 그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 이 주인님이 지금 장난하나! 남의 집을 막 내리치고 그럼 안되죠!”

조그만 요정이었다. 귀가 뾰족하고 망고모자를 쓰고 줄무늬 옷에 멜빵을 찬, 요정이 튀어나왔다. 머신에서, 낡은 머신에서, 요정이 튀어나온것이다.
민석은 제가 아직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요정이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기 전까진.
“옷은 또 이게 뭐야! 커피에 대한 예의도 없어요? 하, 주인님 너무하시네 진짜.”
한대 쥐어박으면 바스라질것같이 작고 여리여리한 주제에 어찌나 카랑카랑 잘도 떠들어 대는지 민석은 얼결에 바리스타복까지 챙겨입고 다시 머신앞에 서게 됬다. 민석은 제가 바보가 됬거나, 미쳐버렸거나 둘 중하나라고 생각했다. 제앞에 뽈뽈뽈 날아다니는것이 동화책에서나 보던 요정이라는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기는게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흥 뭘그렇게 봐요. 커피요정 처음봐요?”
민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공룡화석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은 요정은 흠흠거리며 제 소개를 했다.
“커피요정 찬열이에요. 완전 최상급 요정이구요, 이 세상 그 어떤 요정보다 제일 커피 잘만들어요. 주인님은 복받은거야.”
민석은 이마를 짚었다. 요정이 더있어?
“어어, 지금 그거 되게 저 무시하는 제스쳔데. 기다려봐요. 다시 커피 만들어 줄테니까. 내 커피먹으면 완전 뿅간다 주인님?”
그리고는 낑낑대며 머신 뚜껑을 열지도 못하는 요정, 아니 커피요정 찬열에 민석은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건 미친거고 일단은 너무 귀여웠다. 뚜껑을 열어주자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 찬열에 민석은 또다시 한참을 머신앞에서 기다려야했다. 기다리는 동안 또다시 꿈인지 생신지 제 정신상태는 과연 괜찮은지 고뇌하던 민석은 아까보다 더 오래걸리는 시간에 커피머신을 똑똑 하고 두드려보았다.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살짝 뚜껑을 열어본 민석은 아기자기한 내부에 감탄했다. 인간세상의 축소판인듯 작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커피를 만드는 기계가 놓여있었다. 그 안에서 열심히 커피의 온도를 맞추고 있는 찬열이 보였다. 땀까지 흘리며 집중한 모습에 민석은 살며시 뚜껑을 닫았다. 귀엽지만 실용성은 제로, 라고 생각할때쯤 드디어 커피가 쪼르륵하고 나왔다. 생각보다 굉장히 구미를 당기는 감미로운 향에 놀란 민석은 조심스레 커피잔을 쥐었다.
어느새 나왔는지 찬열이 눈을 반짝이며 민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모금, 커피를 넘기자 황홀한 미감이 민석을 덮쳐왔다. 그 어떤 최고급 커피머신도, 최상급 바리스타도 이런맛은 내지 못할것이다, 커피매니아 민석은 감히 그렇게 평가할 수 있었다. 정말 황홀 그자체였다.
“진짜 맛있어.”
“그쵸? 맛있죠? 것봐! 주인님 이제 찬열이 없인 못살걸!”
“너무 느린것만 빼면 진짜.. 최고다.”
찬열은 신나서 방방뛰다 민석이 덧붙인말에 상처받은듯 급하게 우울해졌다. 수제라서 그런건데.. 찬열이가 일일이 온도 맞추고.. 섞고 해서 그런건데..- 급기야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찬열에 당황한 민석이 미, 미안해! 어쩐지 너무 맛있더라. 이, 이것봐. 주인님 벌써 다 마셨네~? 하고 찬열을 달랬다.
“씨잉.. 주인 잘못 걸렸어! 기껏 데려와 놓구 한번도 쓰지도 않고! 내가 새벽에 얼마나 힘들게 우리집 여기로 옮겨놨는지 알아요?”
커피머신의 위치를 바꾼것이 찬열이었구나, 생각한 민석은 낑낑거리며 머신을 옮겼을 찬열을 상상하니 너무나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웃어요! 주인님 미워! 아, 아. 미안해. 풉.. 아 주인님 진짜!

2. 그 후로 커피요정 찬열과 민석의 동거아닌 동거가 시작됬다. 찬열은 현대문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듯 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어 커피머신 속에서 잘 나오지 않는 찬열이었으나 민석이 출근한 후 몰래 부엌을 뒤지다 발견한 초콜릿에 그만 반해버려 그 후론 현대문명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결국은.. 찌들어 버렸다.

요즈음, 민석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보는 모습은 쬐끄만게 거실을 잔뜩 어질러 놓고 낄낄거리며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있는 커피요정 찬열이었다. 아니, 무슨 요정이 저래. 싶지만 현실이었다. 제 커피요정은 물질문화에 찌들어 지금도 조그만 발가락으로 리모콘을 누르다 잘 안되자 리모콘을 발로 퍽퍽 차는 그런 요정이었다. 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향했다. 언제 따라왔는지 찬열이 방긋 웃으며 주인님! 왔으면 기척을 내야지! 하며 애교를 피우기 시작했다. 요즘 아침드라마를 보더니 넥타이를 메거나 풀어주는데에 재미가 들려 매번 제 넥타이를 책임지던 찬열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중해서 넥타이를 풀어내는 찬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석은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고 나름 애교도 만점인 찬열이 있다면 결혼도 필요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라고 생각한것은 다음날 아침, 산산히 부서져내렸다.
'오늘은 쉽니다.'
오랜만의 휴일에 늦게까지 자다 일어난 민석이 찬열의 커피머신 앞에 섰을때 본 문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민석은 찬열을 찾았다. 거실 쇼파에 누워 예능을 보고 있는 찬열을 발견한 민석은 한숨을 푸욱 쉬곤 찬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쉬는거야?”
찬열은 민석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으로 배를 벅벅긁으며 대꾸했다.
”오늘 근로자의 날이잖아요. 나도 근로자니까 쉴꺼야.”
민석은 어이없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맨날 천날 티비보고 게임하고 과자 꺼내먹고 자고 뒹구는 주제에 근로자? 이게 진짜 근로의 참맛을 보고싶나.

“그런게 어딨어. 삼십분이면 되잖아. 한잔만 타줘.”
“언제는 너무 느리다면서요. 빠른 커피믹스 타드세요.”
갑자기 또 왜 삐진것인지, 민석은 피로해지는것을 느끼며 찬열에게 다가갔다.
“요정니임. 주인은 커피요정 찬열님이 타준게 세상에서 젤 맛있는데.”
“흥”
“요정니이임.”
“아 주인님도 근로자의 날엔 쉬면서 왜 자꾸 저 괴롭혀요! 쉴꺼야아!”
“... 요정님 너무해. 주인님 딱 한잔만 타주지...”
“... 그럼 주인님도 쉬지말고 일해요! 찬열이한테 커피타줘!”

찬열이 땡깡을 피우는 바람에 또다시 바리스타복까지챙겨입고 원두를 갈던 민석은 황금같은 휴일에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후회가 됬다. 그냥 옛날 제 보물1호였던 최신식 고급커피머신으로 타먹을걸. 괜히 제가 제 무덤을 판것이었다. 이런 주인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은 식탁에 걸터 앉아 우와! 주인님 솜씨 좋은데요? 우와우와! 하고 감탄하기 바빴다. 원두에 물을 붓는 집중타임이 오고 민석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 붓는데에 열중하자 덩달아 찬열도 조용해졌다. 집중해서 커피를 타는 제주인의 모습이 생각보다 너무 멋졌다. 민석의 살짝 찡그린 눈썹과 야무지게 닫힌 입술이 찬열의 가슴속에 쿵 하고 박혔다. 멍하니 민석을 바라보던 찬열은 민석이 다 됐다! 이제 마셔봐. 하고 저를 툭 칠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야. 표정이 왜그래. 맛없어?”
“아, 아니에요. 진짜진짜로 맛있어요!”
“다행이다. 매일 니가 타주는 것만 먹다가 오랜만에 타보니까 잘 안되더라고. 어, 근데 귀가 왜그렇게 빨개?”
“네? 이, 이건.. 커피요정들은 남이 타주는 커피먹으면 다그래요! 이, 이제 제가 주인님 커피 타드려야겠다!”
그렇게 커피머신속으로 쏙하고 들어가버린 찬열을 눈으로 쫓던 민석은 피식하고 웃었다. 이것봐, 귀엽잖아. 진짜 커피요정 하나만 있으면 열 아내 안부럽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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