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착찹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한미 FTA 날치기 처리 때문이다. 그러나 날치기 때문에 내가 착찹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면 FTA에 대한 찬반을 넘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개인적인 우려가 다시 한번 실현되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FTA에 대해서 뭐라 입장을 밝힐 만큼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그 찬반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이 원한다면 나를 FTA 반대론자라고 전제하고 보아도 상관 없다.

1987년 체제의 성립과 그에 따른 민주화가 현재에 이르면서 성립한 현저한 헌정관행의 하나는 대부분의 법률이 여야의 합의로 처리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극심한 정치적 충돌이 야기된다는 것이다(이번에는 조약이 문제되었지만 이는 헌법상 법률에 준하여 취급되므로 이하에서는 별도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대부분의 법률은 기술적 성격이 강해 정부주도로 관료/전문가 집단이 입안하는데, 이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가 발언할 여지가 크지 않다. 그리고 실제로 이익집단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로비는 상임위단계에서 집중되고 거기서 정부안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의원안을 다소 고려하거나 절충하는 대안이 성립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대안은 상임위를 무사히 통과하였으므로 본회의에서도 큰 문제 없이 의결된다. 즉 대부분의 법률은 여야 합의로 처리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정치적 성격이 보다 강하더라도 여야가 사활적 이해관계가 없으면 표결로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예는 드물다. 게다가 이러한 법률은 여야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여야 모두 사활적인 이해관계(그것이 계급적이든, 아니면 정세적이든)가 걸려 상임위단계에서부터 격렬한 충돌이 있는 법률들이다. 이러한 법률은 그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바로 여기서 격렬한 몸싸움이 발생하므로 오히려 미디어의 주목을 끌게 된다. 특히 대부분의 법률이 합의로 처리되는 현상에 비추어 이러한 강행처리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만일 의회의 다수당이 어떤 법률을 관철시키려고 하지만 소수당과 여론이 반대한다고 할 때, 우리 정치시스템은 대의제의 원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를 처리하고자 한다. (1) 의회 내에서 법률과 자치법규가 정하는 바에 따라 토론을 하고, (2) 표결에 따라 법률을 처리한다. (3) 이것이 국민/해당선거구 다수의 의견과 반대되더라도 그것은 법률의 성립과 효력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의제는 기속하지 않는 위임이 핵심이기 때문에, 이른바 "역풍"을 맞아 다음 선거에서 낙선을 하여 더 이상 대표가 될 수 없는 불이익 외에 구체적인 기속은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직접민주주의적인 비판을 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일단 여기서는 그에까지 이야기를 미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의 경험으로도 대의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충분히 검증되었다는 점은 여기에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우리의 경우 대부분의 법률에서는 이러한 모습은 관찰되지 않는다. 여야는 국민에게 대체로 보이지 않는 상임위에서 협상으로 법률안을 성립시키고, 본회의에서 대체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다수로 통과시킨다. 그러나 그런데 여야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법률의 경우, 이에 대해 예정된 앞서 말한 절차는 실제로 처음부터 준수되지 못한다. 소수당이 다수당의 표결을 상임위단계에서부터 "실력"으로 저지하기 때문이다. 이때 다수당의 선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법률안을 포기하거나 대폭 양보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 또는 날치기를 하는 것.

다수결에 부치려는 다수당에 대해 통상 행해지는 비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를 채택하는 것은 충분한 토론을 통해 논의가 성숙함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다수결을 강행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경우 다수당이 강행하는 많은 법률에 대해 논의가 부실하게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수결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회에서 토론은 어디까지나 법률과 자치법규 즉 의회 자신이 정한 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회 자신이 결정하였던 절차에 따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미리 규정된 토론의 의회내 절차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법안은 합의에 이를 때까지 무한한 토론의 대상이 될 뿐이다 - 그리고 법률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당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제수단은 절차적인 것 즉 표결을 무한히 미루는 방법이 아니라 내용적인, 실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방법은 정치적인 해결로서, 대통령의 거부권, 상원이 있는 경우 그 의결에 따른 통제, 일정한 요건에 따른 국민투표, 미국의 예와 같은 필리버스터 등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첫번째의 것 뿐이며, 그것도 흔히 그러하듯이 다수당이 대통령을 배출한 때에는 소용이 없다. (게다가 상원의 통제나 필리버스터는 미국과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법적인 해결로서, 위헌법률심판이나 권한쟁의심판에 의하여 효력을 다투는 방법이다. 그러나 법률의 위헌이 항상 쉽게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현실에서는 오히려 예외이다. 권한쟁의의 경우 헌재는 이미 날치기에 면죄부를 부여한 바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마 정치적으로 헌재가 달리 결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헌정관행상 그것은 모든 법률이 합의로 처리될 것을 요구하는 결과에 도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국회에서 여야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법률은 다수당의 날치기에 의해 처리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적인 관찰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신한국당의 노동법 처리, 열린우리당의 사학법처리, 이번의 FTA 처리 등에서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이것은 고통스럽다.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법률이 그것의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통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려스럽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법률들도 앞으로 동일한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매우 불편하다. 만일 의회에서 내가 지지할 만한 세력이 다수를 획득하고 혁신적인 누진세 법률을,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수반한 대학등록금 완화법률을,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경제법률을 추진하려고 할 때, 한나라당이 상임위단계에서부터 실력저지를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 현재의 헌정관행상 날치기밖에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날치기를 권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FTA를 날치기한 한나라당에 나는 무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는 도저히 심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은가?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일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해야 하는가? 다원적인 헌법질서에서 그렇다면 목적은 도대체 누가 어떠한 절차로 정한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들에서 벗어나게 할 제도적 개혁은 무엇이어야 할까? ... 무수한 의문들이 마음을 착찹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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